-
창덕궁 & 후원쉬는시간 /소풍&여행&기타 2018. 10. 26. 21:08
2018년 10월 25일, 목요일 ~
오늘은 휴가를 내고, 아내와 함께 한양을 다녀왔다.
한남동에서 볼일을 마치고, 안국동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해결한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의 퇴근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계절적으로 가을에 서울도심에서 찾을만한 곳은 고궁이 제격이다.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등은 몇번씩 관람했던 곳이기에 . . . .
이번에는 오래전부터 벼루던 "창덕궁 & 후원" 을 가보기로 한다.
창덕궁 후원 "비원" 은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해야만 입장이 가능한곳이다.
그리고, 입장가능 인원도 회차별 100명으로 한정되어 있는 곳이기에
지방에 거주하는 우리내 에게는 쉽게 접근할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가을에는 "후원에서 만나는 한 권의 책" 이란 행사가
10월16일부터 11월18일까지 열리는 관계로 당일,현장입장이 가능하며
다행스럽게 회차별 입장가능 인원도 200명으로 늘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멀게만 느끼던 창덕궁 후원 관람 기회가 우리 부부에게도 찾아왔다.
인정전 ~
부용지 ~
현대사옥 부근에서 점심을 칼국수로 해결하고,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으로 왔다.
창덕궁(昌德宮.사적 제122호) 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하며
태종4년(1404년) 10월부터 궁궐을 조영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405년에 완공되었고
그후 계속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으며
태종12년(1412년)에 돈화문(敦化門)을 건립면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는데 선조40년(1607년)에 복구가 시작되어광해군2년(1610년)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인조1년(1623)년 인조반정 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렸고 인조25년(1647년)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으며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고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었는데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및 동, 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들이 해체되어 이곳의 복구에 전용되었다.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곳으로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되었는데 두 궁궐을 함께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 보물 제383호) 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조선 태종12년(1412년) 5월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선조40년(1607년)에 복원이 시작되어 광해군1년(1609년)에 완공되었는데
"돈화(敦化)"라는 말은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이며
여기에서는 의미가 확장되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다포식 우진각지붕 남향 건물로 넓은 계단이 있는 장대석의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12개의 평주가 사방에 있고 가운데 4개의 고주(高柱)가 있어 고주 사이에 거대한 판문(板門)이 두 짝씩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은 3문형식인데 중앙은 어문으로 왕의 전용 문이고 좌우의 문은 당상관 이상의 높은 관료가
드나들었으며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 정오(正午)와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서울의 궁궐 정문 중 가장 당당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고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서울 숭례문, 창경궁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대규모 문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정문 오른편에 매표소 이다.
입장요금 - 클릭하면 크게보임
매표시간 ~
이 행사가 있었기에 현장발매를 하여 창덕궁 후원까지 관람이 가능했다는 거다.
이런 해설시간표, 안내판도 있다.
우리부부 두사람 활인이 되어, 13.000원에 후원까지 관람 ~
돈화문을 들어서서 직진한다.
잠시후에 회화나무 고목이 나타나고 . . . .
오른쪽으로 커다린 느티나무 아래에 금천교, 그리고 진선문 이다.
금천교 설명은 후원까지 다 ~ 둘러보고, 창덕궁을 나갈때 설명하기로 할거다.
금천교에서 직진방향, 궐내각사 권역으로 들어간다.
궐내각사 관람,동선 안내도 ~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복원되었다 한다.
전각 배치도 - 가운데 금천이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흐른다.
내각을 들어선다.
창덕궁 규장각(奎章閣) 은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자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2층 누각형태의 건물인데, 후원에 있는 규장각이 거리가 너무 멀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곳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규장각 앞에서 오른쪽 검서청 쪽으로 간다.
검서청 - 규장각 관원, 검서관이 근무하던 곳이다.
창덕궁 운한문(雲漢門) - 역대 왕들의 글과 그림을 보관하였던, 봉모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관람 동선의 금천은 매말라 있다.
파란 바탕색에 노란 은행잎 하늘이다.
구,선원전 쪽으로 금천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간다.
창덕궁 억석루 - 어필,편액을 보관하는 2층 행각으로 영조의 글씨이다.
선원전(보물,제817호) ~ 왕의 초상화를 모셨던곳 이라고 . . . .
전주, 경기전에서 이성계 어진을 본적이 있다.
창덕궁 양지당 - 국왕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잠시,머물던 장소라고한다.
약방 - 궁중 의약을 담당하던 곳
약방 내부 ~
다시, 금천교 앞으로 나왔다.
금천교 옆에 고목이 된 회화나무, 금천은 물이 말랐다.
금천교에서 동쪽으로 진선문 이다.
진선문은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때 헐렸다가 1999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진선문 편액 ~
진선문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마당 가운데로는 어로(御路)가 나 있고,오른쪽의 호위청, 상서원 등의 행각은 공사중이었다.
마당 왼편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직진방향으로 중문,숙장문이다.
숙장문은 조선 성종때 서거정이 이름을 지어 올린것을 성종이 낙점하여 지었다고 한다.
인정문 입구에 있는 안내판 ~
인정전 일원, 전각 배치도 ~
인정문을 들어선다. 창덕궁 인정문(昌德宮 仁政門. 보물 제813호) 은 인정전의 정문으로
태종5년(1405년)에 창덕궁을 지으면서 건립한 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는데
이후 영조20년(1744년) 불이 나면서 좌우행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에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목조건물로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놓고 사방에 평주를 돌리고가운데에 두 개의 고주를 세워 고주 사이에 두 짝의 판문을 달았었으나 현재는 개조되어 변형된 모습이며
정면 기단의 중앙에는 건물 어간(御間)과 같은 너비의 계단을 두고 있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 국보 제225호) 이다.
창덕궁의 정전이자 법전(法殿)으로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거행하는
중요한 건물인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겹처마 중층 목조건물로 상하층으로 된
기단은 2장대석으로 쌓았으며 상하층 월대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였고 돌계단 난간에는
8마리의 석수(石獸)를 새겼으며 가운데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踏道)를 설치하였다.
인정전의 앞쪽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르는데
삼도의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이며 문무관으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18품계를 새겼으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인정전은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물로 창덕궁을 건립하던 태종5년(1405년)에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으로 지어졌으나 세종1년(1418년)에 규모가 큰 건물로 고쳐지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중건한 이후 순조3년(1803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과 철종8년(1857년)의 보수공사 이후 지금에 모습에 이르고 있다.
아래층 4면에는 칸마다 문짝이 달려 있고 중앙칸과 좌우 협칸, 뒤쪽 어칸 및 오른쪽 한 칸에는 출입문이 달려 있으며
내부는 통층인데 정면에는 국왕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병풍이 있으며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등과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오면서 설치된 것이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 궁궐의 세 정전 중 하나로 건축적으로는
규모가 근정전보다는 조금 작고 건립연대는 명정전보다 뒤떨어져 중간 위치에 있다고 하겠으나
조선왕조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던 점에서는 다른 정전과는 또 다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다.
인정전 내부 - 어좌, 용상이다.
일월오봉도 ~
인정전 내부, 천정이다.
인정전 앞에서 남쪽방향으로 바라보는 인정문 이다.
역시, 누가 뭐라해도 ~ 국보는 국보다.
인정전을 나와, 선정전으로 가려고 선정문으로 들어선다.
선정문 입구의 안내판 ~
선정전 일원, 전각 배치도 ~
그리고 선정문 돌계단 옆에는 선정전이 보물, 제814호 라고 ~
선정문에서 복도각을 몇 걸음 진행하면 선정전이다.
창덕궁 선정전(昌德宮 宣政殿. 보물 제814호) 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조선시대의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며 기와는 청기와를 사용하였다.
선정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태종5년(1405년)에 처음 지어진 건물로 조계청(朝啓廳)이라는 건물이었는데세조7년(1461년)에 선정전으로 개명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복구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재차 소실된 것을
인조25년(1647년)에 중건하였으며 건물은 둘레에 행각으로 둘러쌓여있고 정면에는 선정문과 선정전 사이에 어로(御路)인 복도가 설치되어 있다.
선정전 내부 천정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삼고 정면과 측면에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12개의 평주(平柱)와 2개의 고주(高柱)로 이루어진 건물에는 사면에 흙벽 없이
사분합(四分閤)의 광창(光窓)과 문짝으로 벽을 쳐서 방안이 어둡지 않게 하였고
실내에는 해와 달 그리고 산수, 소나무를 그린 일월도 병풍을 왕의 의자 뒤에 세워두었으며
의자 위쪽 기둥 사이에는 왕의 위엄이 돋보이도록 보개를 설치하였다.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이곳을 혼전(魂殿)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곳으로 현존하는 궁궐의 전각 중에 유일하게
청기와로 지붕을 얹은 건물이며 조선 중기 공포의 형상을 잘 남기고 있어 공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희정당 안내판 ~
희정당 앞으로 이동한다.
관람이 불가능한 구역이었다.
창덕궁 희정당(昌德宮 熙政堂. 보물 제815호) 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국왕의 편전으로 사용한 건물로 처음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연산군2년(1496년)에 숭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소실된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익공계 팔작지붕 단층 목조건물로 정면 9칸, 측면 3칸은 거실로 꾸며좌우에 각각 한식 응접실과 양식 응접실로 나누었으며 나머지는 그 바깥둘레에 툇간으로 꾸며서 통로 혹은 골방으로 썼고
목욕탕, 칸막이방 등을 마련하였으며 1920년에 재건할 때는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면서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미고 양식 탁자를 들여놓은 모습들이 남아 있다.
원래는 순수한 궁전 건물 규범에 따라 지어졌던 건물이나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변화되었으며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되는 건물이다.
희정당을 나와 바로 옆, 동쪽의 대조전 으로 이동한다.
대조전 안내판 ~
선평문을 올라서면 대조전이다.
보물 제816호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 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로
조선 태종5년(1405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은 것인데
1917년에도 또 한번 소실된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를 이곳에 옮겨와 다시 지은 건물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4칸의 익공계 겹처마 팔작지붕 단층 목조건물로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거실의 동, 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고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으며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지붕에 용마루가 없고 내부에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갖추어 놓아 현대적인 실내장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인 건물이며조선 왕실이 생활하던 건물로서 특히 한말 황실의 내실(內室) 모습을 남겨두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전 내부의 가구를 보수중 ~
남,녀 두분이 작업 중 이었다.
대조전 동편의 전각이다.
대조전에서 앞쪽의 넓은 광장으로 되돌아 나온다.
광장으로 나오면서 오른쪽,서편은 지금까지 지나온 동선- 희정당,선정전,인정전 방향이고 . . . .
왼쪽, 동편은 성정각 일원이다.
광장에서 동쪽의 함양문 앞으로 이동하였다.
보여지는 이미지 상으로 오른쪽은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함양문 이고,
가운데는 후원 입구이고, 왼쪽 담장의 작은 문을 통과, 성정각으로 들어갈거다.
창덕궁 성정각(誠正閣) 은 동궁에 딸린 전각으로 세자가 학문을 익히던 곳이며
한때 내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곳으로 성정이라는 명칭은 공자의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한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의 건물로 서쪽부터 마루 2칸, 방 2칸을 두었고동쪽에는 남북 3칸의 누마루를 설치하였으며 누마루에는 희우루(喜雨樓), 보춘정(報春亭)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희우루는 정조1년(1777년)에 성정각의 누각을 고쳐 지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같은 전각인데 위,이미지 동편에는 희우루라고 씌였고, 남쪽편에는 보춘정 이라고 씌인 편액이 두개이다.
성정각 전각의 동남쪽 모퉁이에 편액이 두개 달린 자그만한 전각이 . . . .
오른쪽에는 보호성궁 이라고 씌였고 . . . .
왼쪽에는 조화어약 이라고 씌여있는데, 의약에 관계되는것 같다.
성정각을 나와서 낙선재 쪽으로 간다.
낙선재, 전경이다.
낙선재 일원 전각 배치도 ~
낙선재 안내판 ~
낙선재 입구,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낙선재로 들어간다.
낙선재 정문 입구에는 장락문 이라고 . . . .
흥선대원군 글씨이다. -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는 의미라고 . . . .
낙선재 마당으로 들어서니, 해설사께서 탐방객들에게 해설중 ~ 왼쪽 뒤편은 상량정 이다.
창덕궁 낙선재(昌德宮 樂善齋. 보물 제1764호) 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며
헌종13년(1847년)에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던 곳이며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이 집무소로 사용하였고
그 후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여사가 기거했다.
낙선재 편액 - 선을 즐긴다는 의미로 청나라때 문인, 섭지선을 글씨를 집자한거라고 . . . .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에 누마루가 딸려 있는 ‘ㄱ’자 형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집이다.
낙선재에서 동쪽으로 진행 ~
복을 내리는 집이란 뜻을 가진 "석복헌" 이다.석복헌에서 동쪽으로 작은 문을 통과하면 ~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기거했던 "수강재" 가 연이어져 있으며
이들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운 꽃계단이 있고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위치해 있는데 관람제한구역이어서 아쉽다.
수강재 편액 ~
수강재에서 앞으로 나왔다.
수강재 앞에서 낙선재 입구쪽으로 돌아나간다.
먹음직 스럽다.
결실의 계절 ~
낙선재 앞 화장실에서 셀카 ~
이렇게 낙선재 일원을 둘러보고 . . . .
함양문 부근의 후원 입구로 돌아왔다.
오른쪽 함양문으로 들어가면 창경궁이고, 왼쪽의 검표대를 통과하면 창덕궁,후원(비원)으로 입장하게 된다.
검표대 윗쪽에 이렇게 알기쉽게 표기되어 있다.
함양문 오른쪽 옆에는 후원,창경궁 관람 표를 살수 있는 매표소 ~
13시30분 ~ 일본어 해설사팀이 후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부부는 아까전에 돈화문을 입장할때
14시 표를 구매했기에 30여분을 이곳에서 쉴거다.
멀리 가운데 높은 전각은 한참전에 들어갔던 창덕궁의 핵심 ~ 인정전이다.
나무벤치에서 휴식중에 오른쪽으로 담아보는 이미지 ~
가운데 육각 누각건물은 서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삼삼와(三三窩),
좌측 건물은 지금은 없어진 중희당과 삼삼와를 연결하는 복도 기능을 했던 칠분서(七分序),
그리고 이미지에는 잘렸지만 우측 건물은 1층은 서고이고, 2층은 세자가 독서를 하던 곳이던 승화루(承華樓)이다.
후원입구에서 망중한을 즐기며, 담아보는 주변이다.
심심한데, 감나무에 감이나 찾아보자 ~
어디 있나 ?
몇개밖에 달리지 않았다.
13시57분 ~ 후원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생긴다.
이런 책 읽기 행사가 있어서 창덕궁 후원(비원), 자유관람이 가능하엿다는 거 ~ 행운이었다.
창덕궁,후원(비원) 으로 들어간다.
진행길에 안내판 ~
창덕궁 후원(後苑) 은 창덕궁의 창건 당시 함께 조성된 곳으로 성종 대에 건립된 창경궁까지 그 영역이 획장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고 후원이 훼손되어 광해군2년(1610년)에 창덕궁과 함께 재건하기 시작하여
그 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왕과 왕실 사람들의 휴식처였을 뿐 아니라 국왕과 왕자들이 글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던 곳이며또 임금이 논밭을 갈고 왕비가 누에를 치는 일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곳으로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하여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하였으며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영역이 자리하고 있고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더욱 자연적인 면이 두드러지면서 뒷산인 응봉으로 이어지며 숲속에는 선원전 같은 제사 시설이 있는 신성한 곳으로
아기자기 하면서도 자연과 함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완만하게 올라서던 진행길이 서서히 내려서게 되고 . . . .
저만치, 영화정이다.
창덕궁 영화당(映花堂) 은 부영지 동쪽에 있는 건물로 광해군 때 처음 지어졌으며
지금의 건물은 숙종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 팔작지붕 목조건물인데
특별한 꾸밈이 없어 소박하면서도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우러져 한국의 미를 잘 표현하고 있는 건물이다.
영화당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거나 활을 쏘기도 한 정원이었고 정조 때부터는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하였는데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관이 자리하여 시제를 내려서 춘당대에서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마지막 시험을 보았던 곳이다.
왼쪽은 부용정 이고 . . . .
오른쪽으로 작은 문, 어수문을 들어서면 2층누각의 주합루, 왼쪽은 서향각이다.
가운데 멀리는 서정기비각 ~
부용지 전경 - 후원 여러곳의 경치중 이곳 부용지가 가장 으뜸일것 같다.(클릭하면 커짐)
창덕궁 부용지(芙蓉池) 는 주합루와 부용정 사이의 장방형 연못으로 세로 34.5m, 가로 29.4m의 크기이며
연못 가장자리는 장대석들을 바른층쌓기로 하였고 못 가운데에 소나무를 심은 둥근 모양의 섬 가장자리도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창덕궁 부용정(昌德宮 芙蓉亭. 보물 제1763호) 은 연못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 모양을 이루는 정자가 있는데 원래 숙종33년(1707년)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가 정조16년(1792년)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부용정(芙蓉亭)"이라 이름 붙였다. 연못 안에 2개의 팔각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을 지은 것으로
연못을 향한 쪽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반대편에는 평난간을 둘렀으며 정자 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고
연못 쪽으로 난 창에는 완자살창을 나머지에는 띠살창을 달았으며 창을 들쇠에 매달면 정자는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후원 초입에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조형원리에 따라 조성한 대표적 연못인 부용지에 지은 마루식 정자로 연못에 인접하여자연의 선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풍류를 통해 수양을 하는 한국 정자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며 ‘十(십)’자 모양의 독특한 평면 형태, 공간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부용정 & 서정기비각 ~
서정기비각(西井記碑閣) ~
세조 때 만든 네 개의 우물인 마니정(摩尼井), 파리정(玻璃井),
유리정(琉璃井), 옥정(玉井)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서정기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다.
연못의 물은 지하에서 솟아오르고 또 서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용머리 석루조(石漏漕)를 통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동쪽 연못 가장자리에 뚫어 놓은 수구(水口)로 흘러 나가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 수구가 있는 연못 가장자리 장대석 하나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어
이는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용머리 석조루 ~
부용지,부용정 ~
안내판 ~
어수문 & 주합루 ~
어수문(魚水門) 은 주합루의 정문으로 임금은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져 있으며 어수문은 임금이, 그 옆의 작은 문(협문)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 宙合樓. 보물 제1769호) 는 정조1년(1776년)에 어제, 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 2층 건물로 5단의 화계 위에 있는데 기단은 네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하였고
기둥은 모두 상하층 통주로 사용하였으며 사방을 외부 기둥에서 1칸씩 물려서 퇴를 두었고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주합루 1층은 규장각이며 역대 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는 곳으로 실내는 가운데 칸을 마루로 하고그 좌우에 온돌방을 한 칸씩 두었으며 2층 주합루는 모두 마루방으로 정조의 어제, 어필, 어진, 보책, 인장 등을 보관했는데
세칭 사검서(四檢書)로 불렸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이 근무하던 곳으로 학문을 연구하면서 임금을 보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취병 & 동궐도 안내판 ~
취병(翠屛) 은 조선시대의 독특한 조경기법 중 하나이며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로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구분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곳 취병은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 그림을 토대로 "임원십육지관병법"에기록되어있는 제작기법대로 대나무 틀을짜고 신우대를 심어 재현해놓은 것이다.
영화당 옆에서 찰깍이다. 이곳 영화당은 책읽기 행사 장소이다.
부용지에서 연경당,옥류천 방향으로 간다.
잠시후, 애련지 & 의두합 안내판이다.
전각 배치도 ~
금마문을 들어서면 ~
의두합 -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공부하던곳이라고 . . . .
전각 편액에는 기오현이라고 씌였는데,‘거침없이 호방한 마음을 기탁한다’는 뜻 ~
진행방향 오른쪽 담장 너머는 ~
애련지 & 애련정 이다. - 애련지의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했으며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愛蓮亭記)’가 ‘궁궐지(宮闕志)’에 전한다.
의두합 앞마당을 나와, 오른쪽으로 연경당은 나중에 둘러볼거다.
애련지 주변은 가을색에 . . . .
. . . .
한복을 입은 젊은 아가씨들 이다.
좋을 때이다.
애련정을 배경으로 ~ 울 아내도 젊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 . . .
애련지에서 바라보는 연경당이 가을속에 파 묻혔다.
옥류천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느긋하게 둘러보게 될거다.
애련정 & 애련지는 ~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方池)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입수구가 독특한데,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물길을 따라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불로문을 나온다.
불로문을 나와서 진행길에 왼편으로 바라보는 애련지 & 애련정이다.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애련지의 물가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이다,
건물을 받치는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사방으로 평난간을 둘렀는데, 낙양창 사이로 사계절이 변하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진행방향이다.
진행길 ~
여기에도 한복의 아가씨들 이다.
위 이미지 아가씨들이 머물던 장소에서 멋진 풍경이다.
경치가 너무 좋아, 울 마눌님을 찰깍한다.
한번 더 ~
와 ~ 정말 좋네 !
안내판 ~
다들 ~ 즐거운 표정들이다.
하늘도 좋고, 단풍도 곱다.
가까이 관람정 이고, 먼쪽이 승재정 이다.
관람정은 그 평면이 부채꼴인 선자정(扇子亭)이다. 6개의 초석 위에 단면이 둥근 기둥을 세웠는데,
4개의 기둥은 연못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홑처마 우진각지붕 모양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만들고
용마루 양끝에는 용두(龍頭)로 치장하였다. 바닥은 장마루이고 땅에 오르는 계단 쪽만을 빼고
나머지 둘레에는 아름다운 평난간을 두르고, 기둥에는 운각판(雲刻板)을 달았다.
석교 건너 가까이는 존덕정 이고, 먼쪽은 폄우사 이다.
‘폄우(砭愚)’란 ‘어리석음을 고친다’라는 뜻이다.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1827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고, 정조 때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궐도>에는 ‘ㄱ’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一’자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온돌방 2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된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이며 마루 쪽은 정면과 측면을 개방하여
평난간을 둘렀다.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댄 초익공 형식의 집이다.
존덕정 석교에서 찰깍해본다.
정자는 6각형 평면의 각 모서리에 둥근 원기둥을 세워
주두와 첨차로 공포를 짠 주심포식으로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놓아
주심도리를 받치고, 또 창방 아래는 빗살무늬 문짝과 꽃살 교창을 반반씩 달았다.
빗살무늬 문짝아래는 문설주와 인방이 짜여지고, 꽃살교창 아래는 낙양각을 두었다.
존덕정에서도 책읽기 행사가 . . . .
존덕정 앞에서 관람정 & 승재정이다.
석교에서 다시한번 찰깍이다.
존덕정이 있는 연못의 물이 차서 넘치면 흘러서 관람정 정자 앞의 관람지로 흘러들게 된다.
다시, 진행길을 이어간다.
앞서가던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 . . .
단풍앞에서 찰깍하고 간다.
진행이다.
아쉬움에 존덕정 쪽으로 뒤돌아보는 그림이다.
진행길은 저만치에서 ~
왼쪽으로 ~
옥류천 방향이다.
진행길 왼쪽에 정자가 있다.
취규정이다. 이곳도 책읽기 장소이다.
취규정 편액 ~
취규정을 배경으로 . . . .
취규정에서 몇 걸음 진행후, 오른쪽 옥류천 쪽으로 내려선다.
이런 멋진장소를 관람하는것만으로도 행운인데 . . . .
하늘과 단풍도 축하 해주는것 같다.
내림이 끝나는 지점에는 취한정이다.
옥류천 일원 정자 배치도 ~
안내판 ~
취한정(聚寒亭) 은 순조 28년 6월 1일부터
순조 30년 8월 1일 사이에 그려진 〈동궐도〉5)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순조 30년(1830) 이전의 건축으로 판단된다.
정면 3간 측면 1간으로 장대석 한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민도리집이다.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바닥에는 마루를 깔고,
사방에 벽체나 창호를 설치하지 않고 개방하였으며, 평난간을 둘렀다.
잠시후, 소요정 이다.
소요정(逍遙亭) 은 인조 14년(1636)에 건립한 소요정(逍遙亭)의 본래 이름은 환서정(歡逝亭)이다.
정면 1간 측면 1간의 사모정으로 섬처럼 따로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아래는 네모나게 위는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워 익공으로 결구하였다. 홑처마 사모지붕인데, 중앙에는 절병통을 놓아 마무리하였다.
소요정 뒤로 소요암과 옥류천 이다.
소요정과 취한정 앞쪽을 흐르는 옥류천은 북악산(北岳山) 동쪽 산줄기의 하나인
응봉(鷹峯) 산록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류와 어정을 파서 흘러나오는 물로 작은 시내가 되어 흐르게 하였다.
소요암부근에서 오른쪽은 태극정이 있고, 가운데 뒤편으로 청의정이 자리한다.
청의정은 창덕궁 후원 옥류천 주변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정자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워졌다. 궁궐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을 이고 있다.
청의정 앞에서 바라본는 소요암 & 소요정 이다.
소요암 뒤편에 물이 솟고 있다.
소요암 옆에는 주목도 있고 . . . .
소요암은 이렇게 생겼다.
그리고 전면에 암각의 글씨가 . . . .
소요암을 만든 때는 인조 14년(1636)이다.
바위 아래에는 인조가 옥류천(玉流川)이라고 제명하였고 . . . .
위쪽에는 숙종 왕이 읊은 오언절구 시 이다.
숙종의 오언절구(五言絶句) "飛流三百尺 落九天來 是白虹起 翻成萬壑雷"를 새겨 놓았다.
그리고 소요암 앞쪽으로 술잔을 띄워 놀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부러 반원형으로 둥글게 물길을 파서 위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위를 빙 돌아서 아래로 떨어지게 했다.
이를 유배거(流杯渠)라고 한다. 거(渠)는 도랑을 말하니 유배거는 술잔을 띄워 흐르게 한 도랑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임금이 조정의 대신들과 모여 이 곳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군신(君臣)이 모여 앉아 유쾌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광경을 생각하면 태평성대(太平聖代)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소요정 부근에서 ~ 이 팀은 일본인 관광객으로 오른쪽에 양산을 쓰신 분이 해설사 이다.
태극정이다.
태극정 은 인조 14년(1636)에 세웠으며, 원래 운영정(雲影亭)이라 불렀다가 태극정(太極亭)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취한정 앞으로 돌아나왔다.
취한정 앞에서 들어갔던 길을 되돌아서 올라온다.
취규정 앞으로 돌아왔다.
취규정 앞에서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다섯시 방향, 연경당 쪽으로 내려선다.
연경당으로 내려서는 길은 ~ 가을 길이다.
내림길이 한참동안 이어진다.
저만치에 연경당 서편이 보인다.
중국인 단체팀들 이다.
하늘을 본다.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
연경당 뒤편을 진행하는데, 탈정문이 있다.
연경당 안내판 -
연경당 전각 배치도 ~
아까전에 애련지 부근에서 바라보던, 연경당 입구로 왔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궁궐지』에는 순조 28년에 총 120칸으로 건립하였다고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순조 27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랑채 평면은 정면6칸, 측면2칸으로서 맨 우측에 누마루가 있고가운데 4칸은 툇간을 개방하였는데, 4칸 중 우측2칸이 대청이고 좌측2칸이 방이다
연경당 정문도 낙선재 정문처럼 장락문 이라고 . . . .
연경당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행랑채 이다.
연경당 마당에 들어서니 행사장 인가 ?
연경당은 원래 왕과 왕비가 사대부(士大夫) 생활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효명세자가 1828년에 사대부의 가옥과 유사한 형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효명세자가 지은 연경당은 동궐도에 묘사되어 있는데,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의 연경당은 1846년(헌종12) 다시 지은 것이다.
행사장 마당을 가로질러 오른쪽은 선향재 이다.
선향재 앞에서 느껴지는 연경당의 앞마당 느낌은 포근하다.
연경당에 한참을 머물다가, 애련지 앞 불로문 앞으로 나오니까 이런 문이 있다. 영춘문 ~
영춘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담장에 있는 문으로 영원한 봄을 기원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돌아나온 부용지 부근이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 ~
부용지, 부용정이다.
오른쪽은 주합루 이다.
기회가 된다면 가족들과 한번 더, 오고 싶은 곳이다. - 클릭하면 커짐
아쉬움에 돌아보는 부용지 ~
완만하게 올라서다가 . . . .
이렇게 마눌님을 찰깍해준다.
완만하게 내려서면 ~
저만치 후원 입구에서는 다음회차 입장 관람객이 대기하고 있다.
창덕궁 안내판 ~
창덕궁 & 후원 관람 이동, 동선 안내도이다. - 클릭하면 커짐
이 안내도를 사전에 미리 보아 둔다면 창덕궁 & 후원 관람에 도움이 많이 될성싶다.
후원 입구를 나와서 돌아보는 그림이다.
숙장문 으로 간다.
숙장문을 통과 하면서 . . . .
멀리에 진선문이다.
숙장문을 나와서, 인정문을 함께 담아본다.
나도 한번 찰깍해본다. 아까전에 낙선재 화장실 셀까에 이어, 오늘 두번째 찰깍해보는거다. ㅎㅎ
가을에 찾는 고궁은 다른 계절보다 더 좋은것 같은데 . . . .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다.
금천교로 돌아왔다.
금천교를 건너와서 돌아보는 그림이다.
창덕궁 금천교(昌德宮 錦川橋. 보물 제1762호) 는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에 위치하며 태종11년(1411년)에 축조된 것으로
그 아래를 흐르는 명당수(明堂水)인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 물가에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였다.
규모는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된 길이 12.9m, 너비 12.5m의 크기이며
교각을 2개의 홍예(虹霓)로 구성하였는데 물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로 홍예를 틀었으며
난간은 머리 부분을 연화보주형(蓮花寶珠形)으로 장식한 법수(法首)와 그 사이에 세운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으며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노부 : 고려, 조선시대에 임금이 나들이할 때에 갖추던 의장(儀仗) 제도 또는 의장을 갖춘 임금 나들이의 행렬)금천교 건너, 느티나무 아래에서는
창덕궁 & 후원 관람의 피로를 말끔하게 풀어주는 귀여운 아가들이 . . . .
아기 엄마의 도움으로 ~
아이들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려고 하는데,쉽지 안았다. ㅎㅎ
세상에 이렇게 이쁠수가 . . . .
ㅎㅎ ~ 기대 이상의 창덕궁 & 후원 관람이었다.
돌아보니, 가운데 인정전 지붕이 보인다.
창덕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돈화문을 나와, 오른쪽 벽면에 있는 그림을 찰깍해본다.
가운데 인정전 뒤편의 숲 속이 후원(비원) ~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담아보는 창덕궁 정문, 돈화문 이다.
창덕궁 & 후원, 관람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아내와 함께, 하계역으로 이동하였다.
공릉동에서 전세집을 살던 아들이 얼마전에 하계역 부근의 아파트를 대출을 끼고 매입하였다.
부모가 되어서 많은 도움을 주지못해 아쉬운점은 있지만, 단칸방에서 시작한 우리부부에 비하면 ~
해가 바뀌고 내년에는 장가를 보낼거다. 오랫동안 만나온 며느리감, 여자친구와 잘 만나와서 고맙고 . . . .
끝
'쉬는시간 > 소풍&여행&기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 감천문화마을 ~ (0) 2019.12.24 여수여행 첫날, 씨티투어 제1코스 ~ (0) 2018.12.03 대구에서 1박2일 ~ (0) 2017.09.04 한반도 지형, 바라보기 ~ (0) 2017.05.14 청풍호, 장회나루 ~ (0) 2017.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