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 백화산산행 이야기 ~/충청도 2018. 3. 12. 21:56
2018년 3월 11일, 오후 ~
충남,서해안에 위치하는 태안, 백화산을 오른다.
이번주말 처음계획은 동해안 해파랑길 걷기로 계획되었는데
토요일에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 어쩔수없이 일요일 산행이 이렇게 된거다.
태안읍사무소 뒤에 우뚝 솟아있는 백화산 (284m)은
전설에 쌓인 명산으로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팔봉산(362m)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내려 태안 읍내를 품에 안은 백화산은 나즈막이 작고 아담한 산이다.
그러나 서해안 인근의 산들이 대부분 단순한 육산인 반면 백화산은 온갖 수석을 모아놓은 듯 기기묘묘한 바위가 서해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져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소나무와 한데 어우러진 모습도 아름답지만 이 산정에서 보는 서해 낙조 또한 일품이다.
실제 산행내역 ~
서산,팔봉산 산행을 마치고 양길리 마을주차장에서 태안군청소년수련관으로 이동해온 지금 시각은 13시30분이다.
수련관 주차장에 주차후, 호국기념탑 방향의 산행들머리로 이동한다.
수련관을 나와 도로를 건너면 백화산입구 표석이 있는 산행들머리가 나타난다.
잠시후, 안내도가 있고 . . . .
이정목도 있다. 정상까지 2km 거리, 산행거리가 짧다.
데크계단을 올라선다.
진행길 ~
배낭은 나 혼자만 짊어지고 오른다.
시작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 . . .
이런 멋진 기암이 나타난다.
앞쪽에서는 이런 형상인데 . . . .
뒷쪽에서 바라보면 ~
불꽃바위 라고 . . . .
불꽃바위를 등지고 바라보는 백화산 정상이다.
불꽃바위 부근 조금 아래에는 아래쪽에 넓직한 공간을 가진 기암이 자리하고 있다.
진행길 전방으로 백화산 정상이 멋스럽다.
용허리 바위에서 걸터 앉았다.
용허리 바위 통과중 ~
용허리 바위를 통과후, 정상을 배경으로 찰깍해본다.
미세먼지로 뿌옇게 다가오지만 산세는 멋지다.
만약, 미세먼지가 없었다면 진행길 오른쪽으로 오전에 올랐던 서산,팔봉산이 조망되었을 거다.(왼쪽 멀리 팔봉산 - 빌려온 그림)
첫번째 쉼터 ~
쉼터 부근에는 ~
멍석바위 라고 . . . .
진행길 ~
진행길 ~
아기자기한 진행길이 . . . .
계속 이어진다.
이건 뭐여 ?
굼벵이 바위 ~
대략 반정도 올라온것 같다.
아차바위 ~
하늘은 맑아 보이지만 ~
실제, 미세먼지가 심하다.
아내는 잘 올라가네 ~ 나는 더워서 헐떡거리고 . . . .
세자바위 라고 . . . .
용상바위에서 포즈를 잡고 . . . .
아내는 오전의 팔봉산에 이어, 오후 백화산에서도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용상바위에서 올라온 능선을 내려본다.
흔들바위 ~
정상까지 500 m 남았다.
두번째 쉼터가 나타난다.
쉼터에 쉬는데, 내가 힘들게 보였는지 아내가 배낭을 둘러 매고 앞서 올라간다.
악어바위 ~
내가 모르게 보약을 먹었나 ?
싱싱 모드 ~
고맙다. 그저 항상 ~ 고마울뿐이다.
세번째 쉼터를 통과하고 . . . .
산신령바위, 주위를 둘러보니 먼발치에 있다.
당겨보니 이렇다.
수녀바위 뒤쪽에는 산신령바위 ~
이거는 둘러보아도 찾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부근에 있는 이거를 찰깍해보았다.
오름구간이 계속 이어지고 . . . .
데크계단 공사구간을 지나친다.
앞서가던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구조목을 지나면 ~
저만치에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백화산성 ~
백화산성은 충남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백화산 정상에 위치하는 산성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2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성벽은 거의 무너진 상태이며 ~
성 안에 우물터 2곳이 있다고 한다.
종합안내도 & 이정목 ~
백화산 산수길 종합안내도 - 클릭하면 커짐
이정목 ~ 청소년수련관에서 올라,태을암쪽으로 하산할거다.
백화산 봉수대 안내판 ~
서산의 북주산과 부석면의 도비산으로 연락을 취하였던 봉수대 ~
봉화대지 ~ 뒷편 정상석 앞에는 아내가 . . . .
뭘 하는지 ?
다가 가서 찰깍해준다.
한번, 더 ~
섭이 엄마 ! 수고 많았수 ~
나도, 흔적을 남겨본다.
한번, 더 ~
아주 오래전 서해안 만리포 해수욕장을 갈적에 태안을 지나치며, 백화산을 올려보았던 기억이 난다.
조망 안내도 앞에 아내가 . . . .
이걸 들여다 보고 있다. - 클릭하면 커짐
안내도, 왼쪽 ~
안내도, 중앙 ~
안내도, 오른쪽 ~
오늘아침 집을 나설때는 서해바다가 보이는 이런 조망을 조금은 기대했었다.(아래 이미지 두개, 빌려온거 ~)
그런데, 음성을 지나 안성부터는 미세먼지로 이런 조망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역시나다.
그래도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하산한다.
쉼터 나무벤치에서 등을 돌리면 쌍괴대 암각글귀가 ~
그리고 그 옆에는 ‘군수 이기석 수식 임인중춘(郡守 李基奭手植 壬寅仲春)’이라고 쓰여 있다.
검색해보니 이기석 군수는 1857년 태안읍 환동에서 태어나 1945년까지 88세를 사신 태안 분 ~
이 분의 생존기간 중에 임인년(壬寅年)은 1902년에 해당되고, 중춘은 음력 2월을 뜻하는 말이니,
이기석 군수가 46세가 되던 1902년 음력 2월에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고 ~
정상에서 태을암쪽으로 하산이다.
하루종일 기분이 업되어 있네 ~
신랑 잘못만나 고생만 실컷하고 . . . . 미안하네 ~
이정목 ~
태을암 뒷편의 정상쪽은 군부대가 위치하고 . . . .
태을암으로 내려서는 데크계단이다.
망양대 ~
망양대, 바둑판 ~
망양대 조금 아래에서 건너다보는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법당 ~
위, 이미지 이정목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태을동천 이라고 . . . .
태을동천 앞쪽에는 일소계(一笑溪)라고 쓰인 바위와 그 옆에 석재비가 ~
그리고, 일소계에서 몇발자욱 위에는 감모대 ~
당겨본 감모대 이다. - 태을동천,일소계,감모대 에 대해 맨 아래에 다시, 서술할거다.ㅣ
마애삼존불 법당 앞 ~
마애삼존불 안내판 ~
국보 제307호 ~
가까이 접근해서 한번, 더 ~
태을암 대웅전 ~
태을암 대웅전 뒷편으로 이동하면 낙조대가 있다고 하던데, 그냥 하산할거다.
이런, 안내판도 있다.
하산을 서두른다. 일찍 귀가하려고 . . . . 아무래도 귀가길은 차량이 밀릴것으로 예상된다.
예전에 이쪽 서해안지역을 산행하고 고속도로 이용해보면 차량정체가 심해, 국도를 자주 이용하기도 했었다.
내림길 묘지부근을 지나며 . . . .
조금전까지 머물던 백화산 정상부근을 올려다 본다.
당겨보니 산객들이 식별되고 . . . .
한참을 더, 내려와 물길을 건넌다.
오른쪽에는 작은 저수지 ~
농경지 팬스 옆을 진행한다.
비닐하우스를 지나는데 여러마리 개가 사납게 짖어댄다. 오른쪽 멀리 비닐하우스에서는 윳놀이하는 왁자지껄 소리가 . . . .
왼편으로 시야를 돌리면 산행초반부에 진행했던 완만한 오름능선이다.
왁자지껄 하던 장소에 도착하니 윳놀이를 마치고 정리하는것 같다.
진행방향 - 오른쪽에는 초원아파트 이다.
초원아파트 쪽으로 이동하면서, 돌아보는 백화산 산세가 멋스럽다.
당겨보는 정상부근 이고 . . . .
우리지역은 아직도 멀었는데, 마늘이 벌써 이렇게 크네 ~
다시 돌아보는 백화산 산세 ~
교회앞을 지나고 . . . .
산행 종료지점,초원아파트가 가까워진다.
교회마당에는 관광버스, 산행 뒤풀이로 족구시합을 하고 있는 단체팀들이다.
초원아파트를 지나, 저만치 큰 도로 쪽으로 진행한다. GPS 종료 ~
돌아보는 초원아파트 이다.
태안군 교육문화센터 를 지나친다.
태안군립중앙도서관을 지나고 . . . .
산행날머리 초원아파트앞에서 도로를 따라서 1km 진행, 태안군립쳬육관 앞 사거리에 도착이다.
사거리 통과, 왼쪽은 태안군 청소년수련관 ~ 이렇게 원점회귀, 백화산 산행이 종료되었다.
태안에서 제천으로 돌아오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 서산-당진-서해대교 구간에서 차량정체로 짜증, 18시50분에 귀가, 일요일 산행일정이 종료된다.
끝
~ 어느님 블로그에서 내용이 너무 좋아, 빌려온 거다. ~
백화산 태을암에 올라 국보인 태안마애삼존불을 찾아가다보면,
먼저 바위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태을동천(太乙洞天)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정도가 너무 선명하여, 이 방면에 문외한인 저로서도
마애삼존불과는 시기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글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아무튼, 바로 앞에 마애삼존불은 6세기경에 조성되었다는 자세한 안내문이 붙어 있어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데,
대체 저 태을동천(太乙洞天)이란 글은 언제 조성된 것일까? 볼 때마다 궁금해 했던 차에
오늘은 사진에 담아 와서 주변 글자까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태을동천(太乙洞天) 상단에 “가락기원 1883년 갑자(駕洛紀元一千八百八十三年甲子)”란 글이 보이네요.
가락(駕洛)이란 지금의 김해지역을 이르는 말이니 김해김씨의 기원을 말하는 것일 테고, 가락국(駕洛國)을 세운 김수로왕이
서기 42년생이니까 태어난 해부터 기원이 됨으로, 42년에 1883년을 더하고, 여기에서 다시 1년을 빼면 1924년이 되네요.
그래서 1924년의 간지를 찾아보니, 정확하게도 갑자(甲子)년이 맞는 군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확하게 94년 전이네요.
그리고 우측상단에는 김해김씨장보품(金海金氏藏譜品)이란 글이 보이는 군요.
글자의 모양이나 형태로 보아 위의 글과 같이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김해김씨에 대한 기록을 감추었다”는 말이니
어딘가에 족보라도 숨겼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상단 글씨 좌측의 이끼 낀 부분이 의심스러워 지네요.
그리고 바로 아래쪽에도 더 많은 글자들이 있는데, 거리가 멀고 이끼가 끼어 잘 보이질 않습니다.
글자가 맞는지도 모르고 해석도 엉망이지만, 여기에 시 한 수를 적어 놓은 듯 하네요.
重來非偶事 가끔 와 봐도 우연한 일이 아니고
詣點說前緣 말로 전해 오는 인연이 여기에 이르렀네
歷歷靈山蹟 영산에 자취는 력력한데
沼然一笑邊 일소계 옆 연못 또한 그러하네.다음에는 카메라를 줌으로 바짝 당겨 찍어서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아니 올라가서 아예 이끼를 긁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태을동천(太乙洞天)이라고 새긴 부분을 살펴봅니다.
글 우측에 “계해맹추김규항제(癸亥孟秋海超金圭恒題)”란 글이 보이네요.
원래 “맹추(孟秋)”란 말은 음력 7월을 달리 이르는 말이니,
“계해년 음력 7월에 김규항이 이 타이틀을 붙였다”는 말이 되네요.
그리고 계해년(癸亥年)이면 갑자년(甲子年)의 바로 전년도가 됨으로 1923년이 되는군요.
그러니까 1923년 한여름에 태을동천(太乙洞天)이라는 글을 새기고,
그 다음해인 1924년에 그 주변에 글을 새기고 족보를 숨겼다는 이야기가 되네요.
태을동천 앞쪽에는 일소계(一笑溪)라고 쓰인 바위와 그 옆에 석재비가 있습니다.
인터넷을 찾다보니 이 글은 태을동천(太乙洞天)을 쓴 김규항의 아들인 김윤석씨의 글이라네요.
김규항씨는 1881년 6월 15일 생이라니까 43세에 이 태을동천(太乙洞天)을 썼고,
그의 아들 김윤석씨는 1917년 11월 26일생으로 시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일소계(一笑溪)를 썼다고 하네요.
이제 조성시기에 대한 의문은 모두 풀렸고,
태을동천(太乙洞天)의 의미를 풀어봐야 하겠네요.
우선 태을(太乙)을 한국고전용어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태일(太一)의 딴 이름. 도교(道敎)에서는
천제(天帝)가 머문다고 믿는 태일성(太一星:북극성)을 말함,
북극(北極), 즉 천극(天極)의 신(神)을 가리키는 말. 천지만물의 출현 또는 성립의 근원인
우주의 본체를 인격화한 천제(天帝)․천황대제(天皇大帝)를 뜻하기도 함.
다음엔 동천(洞天)이란 단어를 문화원형사전에서 찾아보니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이 산다는 별천지” 라고 나오네요.
그러니까 도교에서 유래한 말로 “하늘의 황제와 통하는 신선이 산다는 별천지”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해설에서 보듯이 태을(太乙)과 태일(太一)은 같은 말이 되네요.
예전에 백화산 정상에 태일전이 있었다던데 그러고 보니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는 말이 되네요.
일소계 뒷쪽 약 5m 뒷쪽에 잘 다듬어진 탁자형 조각품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름하여 감모대(感慕臺) ~ 예전 마애삼존불 보호각이 없을 때는 바로 밑에 있었지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이 실시되던 시기, 유생들이 모여앉아
풍류를 즐기며 마애삼존불에 돌을 던지며 놀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의아합니다. 유학을 숭상하고 공부를 하던 유학자가
불교를 적대시하여 불교유적을 훼손하거나 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조각 상태로 보아 위의 태을동천이나 일소계와 시기가 크게 다를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일텐데, 신도를 비롯해 잡다한 미신까지 모두 믿는 일본인들 역시
불교에도 우호적이었기에 훼손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남면 몽산리 석가여래좌상에서 보듯
삼존불의 훼손은 돌을 던져서라기보다는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등
오히려 잘못된 믿음 때문이 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이 감모대(感慕臺)는 부호였던 김씨가문에 의해, 태을동천(太乙洞天), 일소계(一笑溪)를 만든 당시,
이 지역에 부임해 온 수령(당시는 서산군시기)들이 태안을 방문했을 때나, 이 지역 권력층이 이 산에 올랐을 때 등,
이 곳에 모셔 접대를 할 수 있도록 이 감모대(感慕臺)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을 해봅니다.
일제 강점기임에도 태을동천(太乙洞天)이니, 김해김씨장보품(金海金氏藏譜品)이니,
이 정도로 새겨넣을 정도의 가문이면, 당시 권력층에게도 상당히 영향력 있는 부호였을 것으로 추측이 되거든요.
태을동천(太乙洞天) 바로 위에 위치한 이 바둑판 역시 같은 류의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자료를 조사하면서 느낀 점은 모든 백성이 공유해야 할 자연임에도, 어느 일가(一家)의 기록들로
자연이 훼손된 것 같아 오히려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만, 이 역시 사료로서 당시의 연구의 대상은 될 것이니
소중히 관리하면서 더 이상의 훼손은 막아야 할 것 같네요. 나중에 정확한 근거를 알게 되면 이 글도 고치겠습니다.
아래 글은 태안군지에서 옮김
㉧ 김규항(金圭恒)
공께서는 1881년에 태안읍 남문리에서 태어났는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또한 남달리 자비심이 많아 동네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성년이 되어 사회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펴기 시작했는데,
특히 흉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가 하면, 한 편으로는 상비 약품(常備藥品)으로
가세가 어려운 병약자 돕기를 다반사(茶飯事)로 하였다. 또한 어느 봄날 말을 타고 당진(唐津) 지역을 지나고 있는데,
남루한 옷차림의 한 여인이 어린애를 업고 나무껍질을 열심히 벗기고 있었다.
김공은 말을 멈추고 여인에게 다가가 그 용도를 물으니 대용식(代用食)으로 끼니를 잇기 위함이라 했다.
이 말을 들은 김공은 불쌍히 여겨 용돈 일부를 즉석에서 꺼내어 주니, 여인은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며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으니 주소·성명이라도 알려달라고 간청했으나, 공은 그대로 길을 떠나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김공은 많은 소작인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이 사망하거나 혹은 이사하더라도
소작권(小作權)을 빼앗지 않았으며, 또한 흉년이 들어 논 한마지기에서 수확량이 5말 미만이면,
소작료를 받지 않고 전량 돌려주었다. 고리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생활을 이어가는 춘궁기(春窮期)에는
곡물 값을 내려서 팔고 따라서 말(斗)도 후하게 되어주었다.
이외에도 많은 자선 사업을 실시하여 원근 각지에서 주민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지금도 태안읍 남문리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우뚝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