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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년도 지리산 산행기와 옛모습
    산행 이야기 ~/산행지식 & 자료 2010. 12. 8. 16:23

     

    지리산 옛모습과 1957년 지리산 산행기
    작성자 : 윤명수 등록시간 : 2010-11-04 23:43:33 조회수 : 2262 추천수 : 91

     

     

     

     

        아름다운  산행 지리산  



     

           



     

     

    山 行 槪 要

     

         1.     : 2010.10.11. 00:00~12.18:20

      2. 산행자: 놀보 외 1

      3. 산행로:  지리산 주능선(반야봉)

      4. 산행후기

       가. 지리산의 옛 모습

             ①. 천왕봉(天王峰) 정상석 변천

             . 제석봉의 아픈 과거

             ③. 대피소의 옛 모습과 노고단

             ④. 반야봉과 만복대 돌탑이 사라진 연유는 ?

        나.  53년 전 산행후기  

        다. 2010년 10월11일  6차 지리산 산행

             ①. 프롤로그

             . 산행기

             ③. 에필로그

     

     

    .  지리 산의 옛 모습

     

                 . 천왕봉(天王峰)과 정상석 변천사

     

    제정일치 시대(祭政一致 時代)의 군장(君長)을 천왕(天王), 천왕랑(天王郞), 천군(天君)이라 하였다.

    지리산의 천왕봉은 "수호신에게 제()를 올리는 높은 산정(山頂)"이란 의미이다.

     


        옛날 천왕봉에 있었다는 성모사와 천왕봉          김순용옹의 움막 70년대 이 움막을 이용할려면 돈을 지불해야 했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파괴된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있다.

     .

      천왕봉에 있던 성모상과 마애불을 지키며

            천왕봉에 기거 했다는 김순용翁                                중산리의 천황사에 모셔진 성모(2006년 촬영).

     

    1968(?) 천왕봉 성모석상과 석상 1

     

     1965 6월 지리산 등반대 천왕봉 도착 주변 청소후

     

    1965년 지리산종주등반대 2(지리산남부관리소에서 발췌)

     

     

    출처 -연 하 반 (烟霞伴) cafe.daum.net/guryeyeonhaban

     

     

    1977~ 8 년 촬영

      진주지역 산악인들이 82년에 오석으로 세운 정상석

     

        

      사진자료 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깃대봉

    출처 http://www.blackstar.pe.kr/

      

                

                 

    천왕봉의 서측 암벽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의미의 "천주(天柱)"라는 두 글짜가 음각되어 있다.

     

     

      

     . 제석봉의 아픈 과거

     

    제석봉의 고사목은 사실은 화사목(火死木)이다.

    이승만 정권 때 농림부장관의 친척이 아름드리나무를 벌목한 후 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불을 질러 지금의 황량한 봉우리로 남게 된 것이다. 다시 숲이 살아 날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까지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인간의 탐욕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푸른 하늘빛에 대비된 고사목 (枯死木)의 처연한 모습에 

    슬픈 내 가슴 위로 지나가는 운해가 달래주겠는가?

      

     

     

                              

               1956제석봉은 한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제석봉이 사람의 탐욕때문에

                                                                                                        수천년의 이어온 나무가 한 순간에..

     

     

     

     

    제석단(祭石壇) 제석천(帝釋天)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 천제(天帝) 환인(桓因) 말하며,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아버지 환인(桓因) 말하며

     민간에서는 이를 신앙대상으로 삼아 하늘의 주인을 천제석(天帝釋)·천주(天主) 섬기기도 했다

     

     

     

    1960년대 제석봉의 고사목지대 ..   가슴이 아픕니다. 

    화마가 지나간 제석봉 고사목 지대에서의 한 컷

     

    지금은 너무나 변해버린 제석봉 -2006년

     

     

      

    서쪽(장터목)에서 올라가는 입구에는 "하늘로 통한다" 통천문(通天門) 바위굴 사이로 나무사다리

    (지금은 철제 사다리로 교체)를 타고 올라갔다.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서는 반드시 통천문을 통하지않고는 신선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동쪽(법계사)에서 올라 갈려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개천문(開天門)(지금은 개선문)을 통해야 한다.

     

     

     

     

    ③. 세석대피소의 옛 모습과 노고단

     

     

     장터목 대피소 신축 모습(1996)                                         벽소령 대피소 신축 모습!

                       

      

     

     

    세석 대피소 아래 있었던 지리산 신령 우천 허만수선생 의 초막 

     

    지금의 세석 대피소 (국립공원 대피소중 가장 규모가 크다.) 

     

    지리산 중산리에 있는 우천 허만수 선생 추모비 

     

    세석평전에 터를 잡았던 인물 중 가장 최근의 인물은 우천 허만수 선생이다.

    1916년 진주에서 태어난 우천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산의 매력에 푹 빠진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의령 자굴산에서 토굴생활을 하던 중 30대 중반의 나이로 지리산에 입산

    토굴생활을 전전하다가 세석평전에 초막을 마련하는데 이 초막은 훗날 세석대피소의 전신이 된다.

    초창기의 우천은 벌목공이나 짐꾼같은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지리산을 지키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미개척된 등산로를 개척하고 지리산 등산 지도를 만들어 등산객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으며

     태풍에 낙오한 사람들을 자신의 초막으로 대피시키고 무사히 하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1976 6월에 우천 허만수는 마침내 종적을 감춘다.

    우천은 바람처럼 살다가 칠선계곡에서 묻히고 싶다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증명이나 하듯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정선중 著 '살아서 꼭 가봐야 할 지리산 여행' 중에서

     

     

    세석 평전의 옛모습 1                             세석 평전의 옛모습 2

     

      세석 평전의 옛모습 3                                                       옛 세석 산장 4  (현 세석대피소 취사장)

     

     

     1930년대 노고단

     

     1969년 여름 노고단 이화여자대학교 기증 지리산악회 제작 지리산 안내 간판 

       

     이화여자대학교 기증 지리산악회 제작 지리산 안내 간판 설치 후                  1950~1958년 노고단 돌탑

     

                                1964년 여름 노고단 산막앞

        

                     1965 8월 노고단 야영장 (연하반 하계 야영) 

    출처 -연 하 반 (烟霞伴) cafe.daum.net/guryeyeonhaban

     

    돌로 만든 정상석을 언제 누가 처음 세워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앞면에는 천왕봉. 

    뒷면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천왕봉의 싯구에서 뒷부분을 빌려와 새겨놓았습니다. 

    請着千石鐘 /청간천석종/ 청하여 천석종을 보니
    非大叩無聲 /비대구무성/ 큰 종채가 아니면 소리가 나지아니한다네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만고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은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아니하네

     

    나지막하니 딱 앉기 좋은 40센티 정도의 높이로 현재의 정상석보다 장터목 방향쪽에 가깝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의 정상석은 중산리 방향을 보고 서 있는데 정면으로 사진을 찍기에는 공간이 부족해 상당히 위험하기도 합니다.

    조금 뒤로 해도 상관이 없었을텐데 말이죠.

    산의 높이에 비해 정상석이 너무 작아 초라해보였기도 하거니와 먼놈의 낙서를 그렇게 새겨놓았는지

    진주지역 산악인들이 82년에 까만 오석으로 정상석을 다시 세웠습니다.

     

    초기의 정상석과 같은 글귀가 앞면 뒷면에 새겨져있었습니다.

     앞면은 천왕봉/ 뒷면은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 이란 음각이 새겨져있었죠.  

    보통은 이 무거운 돌을 여러명이서 . 
      

    그 까만 오석 표지석의 사진이 82 717일 제헌절에 찍은 사진입니다.

       허망하게 표지석이 얼마지나지 않아 다른 표지석으로 바뀌게 됩니다.

      

    당시 산청함양지역의  5공의 실세 국회의원이 권익현씨였는데, 대통령이 합천출신이란거 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지?

    82 7월 이후 관할 도청인 경남의 이규호 도지사(나중에 교육부장관) 와 권익현씨가 공무원들을 동원

      헬기까지 동원해서 표지석을 바꾸게 되는데 문제는 뒷면의 ‘경남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였습니다. 

     

    85년쯤 보니 뒷면의 경남이란 글자가 누군가에 의해 망실이 되어있었습니다.

    당시 들리는 소문에는 여수산악인 2분이 헤머로 때렸다는 설도 있고 누군가 정으로 쪼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94년쯤에 보니 한국으로 바뀌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전에 지금의 표지석의 모양을 갖춘것 같습니다.

     

    민족의 성산 정상석을  정치세력이 지역감정을  이용되고

    수 천년 내려온 성모상이 72 5월경 무식한 종교인들이 성모상을 훼손하여 15년간 실종되어

     87년 혜범 스님에 의해 몸통과 머리가 각각 통천골과 진주 비봉산 근처에서 발견되어

    머리와 몸통을 봉합한 뒤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니 말입니다.

     

    반 만년의 민족사가 의식없는 정치.종교인의 편협함에 원망스럽습니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민초들은 예나 지금이나 도 시군에 관게없이 조상 대대로 사는 방식 그대로 살고 있더군요.

    백두대간중에 직접 격어보니 전라도 무주군 설천면에 사는 사람은 경상도 말을쓰고

    경상도 하동마을에는 전라도 말씨를 쓰면서  나라도 정권도 행정구역도 필요없이

    지리산 자락에 보금자리를 피고 살아가는 것이 지리산 사람이 아닐까요?

    69년지리산 종주 세째날 아침 노고단 곰할아버지 움막 

    (뒤 쪽의 벽돌건물이 일제 때 외국인 선교사 별장터)

     

    노고단 작전도로에서 선교사 별장터를 배경

    1979년 노고단산장.

     

     

     

    노고단(老姑壇)


    천왕봉과 더불어 노고단은 우리민족의 영원한 믿음의 성지로 전해져 오고 있다.

    동서로 1백리라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솟아 있으면서 지리산이란 큰 궤를 같이하며

    우리 민중의 추앙을 받아온 민족신앙의 영지(靈地) 남아있다.

    해발 1,507m로 일명 고선봉으로 불리는 노고단은 서남방향으로 1718도의 완만한

    경사지대로 대략 35만평 규모의 고원지대다.

     

      신라시대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 올렸는데 지금은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남악사의 유래는 "삼국사기" 제사 부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산과 오악 이하의 명산대천에 대사 중사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를 지내는 오악은 동쪽 토함산,남쪽 지리산,서쪽 계룡산,북쪽 태백산,중앙 부악

    (팔공산)이라고 적혀 있어 지리산은 남악으로 정해져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다.

     

    제사를 올리던 곳이 노고단이며,이처럼 국가차원에서 제사를 올린 의미는 무엇인가.

    사학자들은 당시 이같은 국가의식을 민중들이 받들던 성모신앙과는 그 의미가 다른

    것으로 주장하고 노고단에 남악사를 세워 국가차원에서 의식을 진행한 것은 민중들

    별도 성모사당인 성모사를 위압하려는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신라 시조의 어머니를 모시는 남악사를 세워 민중 차원의 성모신앙(무속신앙

    큰흐름)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 진다는 것이다.이러한 제례는

    신라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변함없이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구한말 융희2 (1908)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악사는 지난 69 12월 전라남도와 구례군에 의해 화엄사 앞에 복원됐다. 신라시대

    이전부터 우리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해온 노고단은 화랑의 심신수련장으로 널리 활용

    된 것으로 전해진다. 멀리 천왕봉까지 오가며 심신을 수련하던 화랑의 높은기상과 기개

    (氣槪)아직도 노고단 언저리에 남아 있는 듯 하다.


    민족의 안식처로 기개를 단련하던 노고단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의 아픔을 겪는다.

    민족신앙의 성지이며, 낙원이던 이 곳이 일제시대때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 솟아 내를 이루며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이곳에는 당시 외국인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다 한다.

     

    더욱이 구례지방에서 조선인 인부들은 벽안의 선교사들을 가마에 태워 이곳 별장까지

    오르내렸다 하니 당시의 서글픈 시대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더욱더 아픈 마음은 거룩한 민족의 성지를 개발의 잣대로 보는 치자와 그를 이용하는

    정치인.시정잡배.몰쌍식한 일부종교인들이 성지를 까 부수고 케이불를 설치하여 훼손

    하려하는데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군상(群像)들은 파리떼처럼 날라 다니기만 한다.

     

     

     

     

    옛날 로타리 대피소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다른 느낌이네요!

      

    쓰레기를 지게로 져서 내리는 모습

     

    1966년 반야봉님,[길상봉 돌탑 ]

     

    신선너덜에 있었다고 하는데..

     

    1956년 이승만 화엄사 방문기념 사진

     

     

     

    ④. 반야봉과 만복대 돌탑이 사라진 연유는 ?

     

     <06.08.02. 만복대에서.>




     

    한 민족은 태고(太古)때 부터 주술신앙을 믿어왔다.

    미신이 삶의 방편으로 수 만년을 살았고 시대마다 조금씩 변하며 진회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대상을 가리지 않고 빌어왔다.

    동네어귀 서낭당과 어느 산 이던지 크고 작은 돌탑이 참 많다.

     

    사회가 불안하고 민초의 삶이 각박하여 어딘가 의지하고픈 섧은마음 일 것이다.
      
    산은 지구에 존재하는 동식물의 안식처이다.

    산은 특정 국가단체나 종교단체의 소유가 아니다.

      

    요즈음(2008)들어 국립공원 내 반야봉. 만복대에 있던 돌탑이 무슨 연유인지 철거되고

    없어졌다.

     

    명분 없이 날뛰는 선무당이 구 무당을 인정하지 않아서인가..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080621. 철거되고 사라진 돌탑흔적-) 출처-기쁜인연님 블러그

     

    돌 하나 하나를 올려놓으며 가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빌며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것이 돌탑이다.

    수 만년을 이 땅에 뿌리 내려온 민생의 샤머니즘을 파괴하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

    오랜 세월 지리산 등산객들의 손길이 닿은 돌탑 중 만복대, 반야봉 돌탑이 이 최근 무너져 내려 흔적도 없다.

     
    08
    0724일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사무소와 등산객들에 따르면

    반야봉(해발 1732)과 만복대(해발 1430)에 있던 돌탑 2개가 무너져 내렸다.



    돌탑들은 등산객들이‘소원’을 빌며 돌을 하나 둘 쌓아 만든 것으로,

    반야봉 돌탑은 높이 160㎝에 직경 1.5m이고, 만복대 돌탑은 높이 3m에 직경 2.5m로,

    돌탑을 쌓기 시작한 지 수 십년은 족히 넘었을 터인데..

     

     

     

    (般若峰)

    반야봉 돌탑


    일부가 무너져 아쉬움이 있는 돌탑, 그래도 반야봉의 상징이다.

     

    두고 온 고향 아내의 젖비린내와 말라붙은 어머니의 가슴팍을 떠올리며 넋을 놓은 채

    천왕봉에 뜬 달을 보고 있던 빨치산과 토벌대 젊은이들의 땀냄새가 뵌 돌탑의 향기가

    사라진 반야봉에서 .. (2010.10.13- 놀보 윤명수)

     

     

     

     

    나. 50년 전의 지리산 산행기

     

     

    2년전인 55년에 지리산 초등을 하고 이제 두번째 지리산을 가기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쌀 여섯되, 미싯가루 두되,군용텐트, 시트겸 판쵸, 군용침낭, 김치독, 간장, 된장, 고추장, 버무린독

    , 마니라로프 20m, 카메라, 쌍안경, 삽, 톱, 야전도끼, 야전곡괭이, 간식, 부식, 세면구, 보온주, 석유

    알코올 한되씩, 알콜깡통, 항고 등등.. 산더미 같은 장비를 쌓아놓고 보니 륙색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자갈치 시장에서 급히 군용 샌드백을 구입했다.

     

    샌드백 한쪽 포켓에 항고가 두개쯤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양쪽을 붙이고 그보다 작은 포켓을

    가운데 붙였다.넣을것이 많아서 위에도 세개의 포켓을 달고나니 아주 근사하다. 이 륙색을 만든

    다음 너무도 좋아서 자다가도 깨어서 만져보고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모른다.

     

     

    1957년 6월 23일

     

    06시 철마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에 오직 나만 믿고 동행한 Y군과

    L군의 얼굴을 쳐다보니과연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마산을 지나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석탄가루가 얼굴에 달라붙고 더워서 질식할 뻔 했다. 12시 40분,부산을 출발해서 6시간

    40분만에 진주에 도착했다.

     

    진주역에는 같이 산행할 Y군의 친구 K가 마중나와 있었다.

    지리산을 잘 안다는 이 친구를 보니 천군마마를 얻은 기분이다.

     

    팥죽같은 땀을 흘리며 역에서 2키로거리인 시외버스 정류소에 오니 하루에 한번 다니는 덕산

    가는 버스가 이미 떠나고 없다. 어차피 진주에서 중산라까지 걷기로 작정하고 나왔으니 하는 수

    없다. 물어 물어 산청방향으로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하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진주에서 "원지"까지가 50리라 하지만 65kg 정도의 짐이 너무 부담스러워 "명석"에 도착하니

    촌보도 움직일 수 가 없어 어느 과수원 귀퉁이에 텐트를 치고 첫 밤을 보냈다.

     

     

     

    6월 24일

     

    "명석"지서 순경이 운이 좋으면 고령토 트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줄터이니 기다려 보란다.

    9시경 요행히 먼지 펄펄나는 트럭을 얻어 탓는데 한참을 가니(12키로 정도) 내리라 한다.

     

    "시천(덕산)"을 향해 또다시 걷는다.

     

    입은 옷이 소금에 절어 뻣뻣해질 때까지 걸었다. 긴 여름해가 어둠에 깔릴 때까지 걸어온 덕분에

    8시경에 덕산장터에 닿아서 강둑에 텐트를 치고 고단한 몸을 뉘였다.

     

     

    6월 25일

     

    덕산에서 "곡점"까지 12키로라고 한다.

    시어서 못 먹게 된 김치 독 1개를 미련 없이 버리고 나니 한결 짐이 가볍다. 덕산을 출벌한지

    4시간만에 곡점에 도착해서 중산리까지 갈려 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더 이상 걷기가 힘이들어

    오늘은 일찌감치 곡점에서 텐트를 친다. 곡점 마껄리도가의 냄새에 이끌려 네 명이 두 말을

    먹고 잠이 들었다.

     

     

     

    6월 26일

     

    오늘 부터는 좀 힘차게 걸을려고 마음을 먹고 중산리를 향하는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빗물이 륙색안으로 들어가서 꿀렁거려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동당리"마을 재실에 대피해서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그칠 기미가 없어 이 곳에서 하루밤 잘 수 밖에 없다.시간이 많아서

    간식으로 콩을 볶아 먹기도 했다.

     

    콩을 먹으며 계속 물을 마셔대던 L군이 저녁에 결국 설사를 만나 고생을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6월 27일

     

    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빗속을걸어 "하중산리"에 닿으니 계곡의 물살이 엄청나서

    칡넝쿨로 얽어만든 통나무다리를 건널때는 눈이 뱅뱅 돌릴지경이다."하중산리"의 돌아가지 않는

    물레방아간에서 잠시 비를 피한 후 다시 빗속의 황토길을걸어서 "중중산리"에 오르니 점심때가

    훨씬 지난 두시 10분 이었다.

     

    쏟아지는 비때문에 밥을 지을수 없어 미싯가루로 허기만 면하고 급한 경사 길을 올라서 드디어

    지리산 천왕봉 초입인 "상중산리에 도착했다. 땅이 질퍽거려 텐트칠 자리가 없어 "홍순표"씨라는

    집에 민박을 했는데 얼마나 방에 불을 많이 땟는지 이틀동안 비에젖은 옷이며 장비가 밤새 바짝

    말랐다.

     

     

     

    6월 28일

     

    오늘도 비는 안그친다.

    중산리 언덕에서 보니 계곡에 집채만한 돌들이 굴러 내려오고 있다. 마을에서 논이 있는곳으로

    가서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근 두시간을 헤메었는 데도 논길을 찾을 수 가없다.

     

    지리산을 잘 안다는 진주의 k군에께 의논을 하니 사실은 자기도 지리산이 오늘 처음이란다.

    그러면 왜 잘 안다고 했냐고 힐책을 하니 안그러면 동행시켜주지 않을 것 같애서 거짓말을

    했단다. 기가 막힌다. 할 수 없어 홍순표씨 집에 다시 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길을 안내 받긴

    했는데 불어난 물때문에 도저히 계곡을 건널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계곡의 물이 빠지는 것을

    기다리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빗줄기는 차츰 약해지며 오후가 되니 그치긴 해도 계곡물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순두류 삼거리지점의 언덕을 깎아 젖어서 납덩이 같은 텐트를 치고 시끄러운 물소리와함께 또

    하룻밤을 중산리에서 보낸다.(지금의 매표소 맞은편 언덕)

     

     

    6월 29일 [도강작전]

     

    물소리 때문인지 도강 걱정 때문인지 잠이 안온다. 지리산의 아침은 우중에도 밝아왔다. 도강

    준비를 하는데 다른 방법이 없다. 마닐라 로프를 활용하기 위해 5미터 전방에 있는 바위까지

    나무다리를 만들기로 햇다.

     

    허벅지만한 나무 세개를 야전도끼로 찍어서 엮어 일단 간이 다리를 만들었다.거기서 부터는 짐

    없이 힘껏 다음 바위로 도약하고 또 도약하고 그래서 첫번째 대원이 넘어갈 수 있었다.

     

    무거운 로프를 강 저쪽으로 던져 나무에서 나무로 연결한 뒤 륙색은 먼저 보내고 대원들은 뛰어

    건너 겨우 도강에 성공했다. 3시간 20분이 걸리는 대 역사였다. 여기서 우측소로를 따르면

    순두류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야 칼바위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왼쪽길로 접어드니 민가 두채가 나타난다 물소리가 얼마나 장황했던지 그토록 고함을 지르고

    했는데도전혀 듣지 못했다 한다.

     

    칼바위에 도착하니 3시30분경. 시계에 물이 들어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첫번째 개울 두째

    개울을 건너고 우측으로 가라는 신신당부를 받았지만 우측에는 길이 없고 왼쪽에 길이 있어

    륙색을 벗어 놓고 정찰에 나섰어나 100미터도 못 가서 길이 없어진다.되돌아와 우측으로 길을

    찾았으나 도저히 나갈 길이 없다. 일제 군용도로 잡목을 베면서 70미터 정도 전진을하니 희미한

    나무꾼 길이 나온다. 알고보니 두번째 개울 건너 다시 그 개울 상류를 건너 우측으로 한바퀴

    도니까 길이 연결이 된다. 길을 찾고나니 안심도 되고 피로가 겹쳐 칼바위 캠프에서 텐트를

    친다.

     

     

     

    6월 30일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강렬한 태양이 아침부터 극성을 부린다.

    엿새 동안의 노독과 도강 작전에 너무 지쳐서 오늘 하루는 여기서 푹쉬기로 대원들이 의견일치를

    한다. 산행로를 확인하기도 하고 물이 줄어든 개울을 건너 다래밭에서 새파란 다래를 서너되나 따

    오기도 했다. 더위를 식히려 차가운 물속에 들기도 하며 한가한 하루를 보내고 내일을 위해

    항고밥을 일찍 해먹었다.

     

     

    어제 실수로 알콜 한되를 쏟아 버렸기에 내일 아침 연료용으로 화력좋아 보이는 솔방울을 따서

    쌀자루에 담아두고 잠자리에 든다. 새벽녁에 L군이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어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니 쥐가 발바닥을 갉아 먹었다고 한다.무슨 그런일이 하면서 내 발바닥을 쓰다 듬어니 우둘투둘

    하다. 기역자 전등으로 비춰보니 쥐의 특유한 두 이빨자국이 선명하다. 다시 잠을청하는데 바스거

    리는 소리에 전등을 비추니 엄지 손가락 만한 새앙쥐가 잠든 Y군의 배를 타고넘어 달아나는 놈을

    워커로 일격을 가해 잡는데 성공한다.

     

     

    7월 1일

     

    하루를 쉬었음 에도 새앙쥐 사건으로 잠을 설쳐 컨디션이 개운치가  않다.

    그래도 육중한 륙색을 메엇다.사람길 인지 짐승길 인지 분간이 어렵지만 간혹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로 길을 확인하곤 한다. 가파른 길을 헤매면서 올라가니 바위가 앞을 막는다.

     

    바위를 탈수 없어 빽하여 길을 찾으니 국사봉으로 오르는 길 같은 것이 보인다. 게속 타고 오르니

    이 길이야 말로 망바위로 오르는 코스였다. 망바위에 올라 성냥갑 같은 중산리를 내려다 보면서

    여기까지 온 것만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앞에 보이는 바위가 문창대라고 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문창대를 지나 법계사 까지는 가야한다.

    확확 쏟는 지열을 감당하면서 문창대에 닿으니 평길이 나와 살만하다.평길이 끝나고 자갈돌길이

    나올 때는 죽었구나 했는데 바위 사이에서 쏟아지는 석간수로 위기를 모면한다.

     

    (지금의 로타리 산장 부근) 은은히 들리는 종소리에 법계사가 가까웠음을 느끼고 급하게 법계사로

    향했다. 혹시 법계사가 아닌건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 무거운 짐과 더위에 지쳐 기다시피 하여

    오르니 정자같은 가옥이 나타난다. 큰 돌위에 석탑이 보여서'옳거니!절집이 맞다고 확신하고

    급경사를 급히 오르니 웬 부인이 반겨 맞는다. 부산에서 왔다고 인사를 청하니 자기는 법계사를

    지키는 손보살이라고 한다.

     

    절 위로 보이는 산봉을 바로 오르고 싶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니 4키로라고 하면서 저봉우

    리는 일출이 장관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고 내일 새벽에 오르라고 붙잡는다.해는 한 발이 남았지만

    혹서에 지친 몸이라 거부할 생각도 없이 머물기로 했다. 텐트를 치고 나니 산삼이라면서 재배한 인

    삼을 한 뿌리씩 준다.

     

    여덟가지의 약초로 직접 빚은 팔선주라는 술도 반주전자나 주어서 멋모르고 마시고 저녁도 굶은

    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7월 2일

     

    고맙게도 손보살이 깨워주어서 눈을 뜨니 새벽 세시였다.

    일출 보기가 힘드니 어떻게 하든지 일출을 보고 오라고 당부를 하는 손보살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햇다. 기역자 군용 후랫쉬를 비추며 한참을 오르니 날이 밝아오면서 앞에 보이는 산봉이

    잡힐듯 하면서 접근하기가 점점 너무나 힘이 든다.

     

    바위가 쫙 갈라진 채 입을 벌리고 있는 곳에 닿았다.이정도 오르면 개선장군들 이라고 생각하고

    이 곳을 "개선문"이라고 명명했다. 집채만한 큰 바위가 길을 막아 네사람이 륙색을 벗어놓고 길을

    찾아 나섰다.겨우겨우 바위뒤쪽으로 나 있는 짐승길을 찾아서 오르는데 정말 힘이든다. 산딸기가

    수 없이 널 부러져 있어도 따 먹을 겨를도 없이 진행한다. 풀을 베고 나무를 찍어내고 나아가니

    20미터 정도의 암벽이 또 길을 막는다.마닐라 로프와 기술을 총동원 햇지만 도저히 오를 수없어

     

    나무를 베어가면서 왼쪽 능선으로 붙었다.

     

    이제 길이 좀 나타날까 했는데 다시 움푹패인 암장 하나가 길을 막는다.산봉은 잡힐듯 가까워

    있고 급한 마음에 바위를 오르려고 몇번 시도를 하나 이끼 때문에 불가능 하여 1시간을 허비 한

    다음 하는 수 없이 우측 계곡으로 들어가 흘러내린 바위를타고 산봉으로 직등을시도한다.넝쿨이

    발을 매섭게 감아쥐지만 단도로 짤라가며 길을만들어서 올라갔다.법계사에서 지고온 물독이무색

    할 정도로 바위틈으로 물이 흐르는 곳도 있다.

     

    좌로 우로 비껴가면서 낙석지대를 오르니 마음은  산봉에 있고 몸은 한없이 지친다.이제부터 길은

    거의 기어서 오른다.  기어서 기어서 오봉 밑에 오르니 감로수가 철철 넘친다 .마지막으로 목을

    추기고 20미터 정도 남은 산봉을 향해 오르는 도중에"김순용"영감이 산봉 밑에 다지다가 둔

    캠프장의 언저리에 삽과 곡괭이가 널려져 있다.

     

    이제 앞으로 10미터!...

     

    감격스런 산봉이 눈 앞에 있다.륙색을 풀어 던지고 가벼운 몸으로 뛰다시피 산봉에 올랐다.

    여기가 천왕봉! 이 감격, 이 환희,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번째의 감격이다.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야호도 웨쳤다.안개가 심해서 일출을 못 보는 것이 안타깝기짝이

    없다.이제 더 갈데도 없다.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는가.그 아쉬움 때문에 도무지 하산 할 수 가

    없어 우리는 천왕봉에 또 캠프를 채렸다.

     

    [ 출처 : 산행일지 ( http://blog.empas.com/hs0362/ ) ] 

    * 위 글은 [우리들의 산] 지에 실린 <성산>님의 산행기입니다.* 

     

    ♡ 오래된 사진은 대부분 산 선배이시며 개척자이신 구례 연하반 회원님들의 사진입니다.

    몇일전 가입을 하였고 그분들의 노력으로 지리산이 보존되고 오늘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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